A의 집에는 네 명의 식구를 위한 네 대의 냉장고가 있다. 어느 평일 오후, A는 냉장고 청소를 하고, 많은 양의 음식물 쓰레기를 추리면서 친구 B에게 그의 성장환경과 그를 뒤흔든 어떤 만남에 대해 털어놓는다. “나는 ‘떠 먹여주는 밥’이 익숙해 …중략…한 때 어느 고학생에게 정을 주었지만, 돌아온 것은 애정이 아닌 신랄한 질타였어.”
청소를 마치고, A는 고학생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기사 (<한겨레 21> 제661호 2007년05월 23일『품위 전쟁』/ 김규항) 를 B에게 읽어주고, 기사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밝힌다. “가난이 아니라 ‘검약’ 의 품위겠지 …중략…가난을 고른 게 아니라 당했으면서 마치 본인이 선택한 것처럼 말하잖아. 나는 이런 기사를 맹신하는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정을 붙일 수가 없었어. 어쨌든 그 사람을 만나면서 ‘영세함’ 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거지.”
A와 B는 집 밖으로 나와 동네를 거닌다. 그들이 배회하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는 철거 촌과 맞붙어 있어 더욱 드라마틱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요청 당하는 곳이다. A는 스스로 가난함에 내성을 기를 것을 다짐하며 몇 가지 방법을 B에게 제시한다. (가난, 검약, 궁상, 청승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두기 / 값 비싼 문화향유에 노출되는 빈도 줄이기 / 누리는 삶에 길들여진 지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기) 빈부의 접점에서 A 가 내놓는 대안은 무책임한 말장난에 가깝다. 하지만, 이는 ‘노동 없이 잘 먹고 살았으니 공격받아도 된다’는 사회의 무의식적인 합의,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에 대응하고, 동시에 A가 유약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다.